2025.05.25. 지리산 둘레길 18코스(송정-오미) 10.4km
◎ 지리산 둘레길
지리산을 둘러싼 80여 마을을 잇는 22구간 285km의 장거리 도보길이다. 지리산 곳곳에 걸쳐 있는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 등을 연결해 트레킹이 가능하도록 환형으로 조성되었다.
차량통행이 많은 아스팔트 길, 안전이 우려되는 위험한 길, 해발 고도가 너무 높은 길 등은 연결을 위한 최소한의 구간을 빼고는 제외시켰다. 2007년 1월부터 조사·설계·정비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여 2012년 5월 전체 구간을 개통하고, 2014년부터 순환로를 포함해 22구간이 운영되고 있다.
◎ 지리산 둘레길에서 만난 "벅수"
길을 떠나는 이들에게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장승은 우리 문화에 스며들어 있다. 벅수는 장승의 다른 말이자 우직하거나 바보스러움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지리산둘레길’에서는 장승형 이정목이 가야할 길을 가리켜 준다. 그 이정목을 형상화하여 우린 ‘벅수’로 부르기로 했다.
지리산 둘레길 '벅수'
‘지리산둘레길’의 우직함 묵묵함을 잇고자하는 마음이다. 세상은 촌각을 다투듯 바쁘고 정신없지만 지리산에 깃들어 보면 참 우직하게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과 숲이 있다.
◎ 지리산 둘레길 18코스(송정 - 오미) 10.4km
산행코스 : 송정마을 - 의승재 - 편백숲 - 석주관 갈림길 - 쉼터정자 - 원송계곡 - 파도리 노인요양원 - 구산리 - 문수저수지 - 내죽마을 - 하죽마을 - 운조루 - 오미마을
◎ 지리산 둘레길 18코스(송정 - 오미)
- 살랑 살랑 불어오는 시원한 산들바람 맞으며 걷는 쉼과 휴식이 있는 싱그런 숲길
지리산둘레길 18코스는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서 토지면 오미리까지 10.4km 거리이다. 지리산 노고단에서 분기된 왕시루봉 산자락을 끼고, 토지면에 걸쳐 싱그럽게 섬진강을 따라 이어지는 숲길이다.
석주관 칠의사 사당 옆을 지나면서 정유재란 때 의병과 승병들이 활약 했던 숨결을 느끼며 걷는 길이다. 초입 송정마을에서 급하게 오르는 숲길을 지나 의승재 고개 마루에 서면, 이곳에서 의병과 승병들이 그 숨가뿐 전장에서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리고 왜군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승화한 그 기개와 충정을 느끼게 한다.
장미의 계절 5월 끝자락, 어느새 온 산하는 연록색 녹음이 짙은 초록으로 변해가고 이제 여름으로 치달을 준비에 여념이 없다. 들녁엔 농부들은 모내기를 위한 물대기가 한창이고 온갖 생명은 그야말로 제철을 맞아 생기있게 살아나는 시기이다. 봄철 야생화는 지고 없지만 여름철로 접어드는 시기의 여름 야생화가 곳곳에 지천이고, 감나무와 밤나무 등 과실나무도 앙증스런 꽃을 피어내며 알토랑 결실을 잉태하느라 숨가쁘게 영글어 간다.
둘레길을 걷는 내내 싱그런 숲속에서 불어 온 시원한 바람결에 실려 쉼과 여유를 만끽하는 둘레길이다.
토지면은 왕사루봉을 중심으로 그 산락에 삶의 뿌리를 일구고 살아가는 구례 사람들의 터전이다. 우리나라 3대 길지라는 금환락지가 있는 곳이다. 앞에는 섬진강이 흐르고 뒤로는 지리산 왕시루봉이 받치고 있으며 앞뜰에는 넓다란 들녁이 풍요로운 터전을 마련하고 있으니 사람살기 좋은 곳으로 이만 한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 지금부터 지리산 둘레길 18코스(송정 - 오미) 를 걸어보자. 시작은 송정마을에서 시작한다. 둘레길 순방향이다.
지리산 둘레길 18코스 시작점 송정마을에 도착 준비 운동하고
시종점 벅수
시종점 인증
초입
가파른 오름길
신록
대나무 숲에 숨어 있는 화전민 집터
어쩜 동학농민운동 패배후 죽음을 피해 문수골에 숨어 살던 그 후손들이 억울한 세월을 보내면서 살아간 집터일까? 여순사건 후 몰락한 패잔병들이 나중에 이현상 빨치산과 합세하여 지리산 빨치산이 되어 지리산에 숨어 살 때 국군과 경찰을 피해 살던 은거지였을까? 암튼 세월은 흐르고 수 많은 애환이 숨겨진 집터를 지나면서 이 땅의 굴곡진 역사의 질곡을 느끼며 걷는다.
노루발
지리산둘레길 18코스의 매력은 이렇게 싱그런 숲길을 걸으면서 섬진강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시원스럽게 느끼며 걷는 시간이다. 짙어지는 녹음을 옆에 두고 불어오는 살랑 바람 곁을 지날 쯤 한없이 즐겁고 머리가 시원하며 마음이 말끔하며 쉼과 휴식을 맛보는 힐링 시간이 된다.
섬진강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골바람이 시원함을 선사하고 마음은 붕 떠서 하늘을 난다.
출발 0.7km 지점
습지 맷돼지 목욕탕
의승재/의승 : 임진왜란 때 의병에 참가한 스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동안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묵살하고 호남의 동인 선비들을 정여립사건에 얽어 모조리 숙청하여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도 전장을 지휘할 인재가 없으니, 이 놈의 나라 꼴이 어떠했는가? 기가찰 노릇이다. 기득권 유지에만 몰두한 정철을 비롯한 서인들의 권력야욕으로 선조의 눈을 어둡게 하고, 나라의 국방을 무방비로 있다가 결국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의 명분 없는 침략에 속수무책 당하여 18일만에 한양이 무너지고 나라가 풍전등화에 하루 앞을 내다 보지 못하고 있을 때, 선조는 세자 광해에게 뒷일을 맏기고 종묘사직을 본존한다는 핑계로 백성을 뒤로하고 혼자만 살겠다고 의주로 피신한다.
의승재 기념 한장
나중에 선조의 주장은 내가 종묘사직을 의주로 피신했기에 그나마 조선이 멸망하지 않았고, 명나라에 군대를 요청했기에 명나라의 도움으로 자신이 일본과 싸워 이겼다고 뻔뻔한 주장을 하면서 그동안 온 강토에서 의병에 참가해 목숨걸고 싸워 온 의병들의 공로를 폄하하고 절집에서 수행을 하는 스님들이 거의하여 의병에 참여하고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그 공을 소홀히 했으며, 남해에서 조선수군이 일본 수군을 무찔러 한양과 북으로 군량미인 식량조달을 차단함으로써 원천적으로 일본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종국에는 두손 들도록 했던 이순신 장군의 조선수군의 공적을 시기 질투하였다.
오늘 함께한 대원님들
돌이켜 보면 나라가 어려울 때 나라를 구한 것은 백성이고 의병이고 승려들이였다. 관군은 어디가고 그 잘나고 똑똑한 고관대작들은 쥐새끼 마냥 지 살겠다고 쥐구멍으로 모두 숨어버리고, 조총 앞에 기마병이 유리하다고 백두대간 협곡인 문경세제를 마다하고 청주 탄금대로 일본군을 유인하였으니 적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무지하고 전술 또한 무지몽매 했는가? 조총을 든 일본군을 상대하려면 우리는 기마병이므로 넓은 평야가 유리하다고 충주 탄금대로 옮긴 신립 장군만 믿고 돌격 앞으로 가다가 조총에 쓰러진 수 많은 조선 기마병들의 목숨은 어찌해야 할까?
하산길 편백 숲
다행히 남해에서 이순신이 일본 수군을 막았고 들불처럼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지리적 특성을 살려 화포와 화승총 그리고 낫과 죽창으로 무찌르면서 조선은 그나마 살아날 수 있었다.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명나라는 조선을 위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고 일본의 세력 확충을 막으려고 조일 전쟁에 참여 했으며, 정작 전장에는 황제군이라고 뒷전에 머물며 온갖 수탈과 부녀자 희롱 등 이루 말 할 수 없는 악폐를 일삼았으니, 일본놈이나 중국놈이나 매 한가지였다.
편백 숲길
조선을 제외한 명과 일본이 휴전 협정을 한다고 기나긴 3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남해 바다를 중심으로 남쪽에서는 일본놈들이 육지에서는 명나라 중국놈들이 마치 점령지라도 된 것처럼 온갖 악폐를 부렸으니 죽으나 사나 힘 없는 나라 백성만 죽을 지경이였다. 온 강토가 처참하게 짓밝히고 사람 목숨은 온데 간데 없으니 그 아비귀환이 어떠했겠는가? 고을마다 피바다요 가족마다 멍이 들어 도대체 그 참담하고 처참함이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편백 숲길
풍전등화에 있는 나라를 살리겠다고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고 전장에 나선 승병들과 의병들의 기개와 충정 그리고 숭고한 희생은 천추에 길이 빛내야 하고 그 정신을 이어 받아 후손들에게 교육해야할 것이다.
녹음속으로
이쪽으로 가세요
맨발트레킹
석주관 갈림길
곧장 내려가면 석주관이다. 석주관성에서 정유재란 때 일곱 의병장과 당시 구례 현감이 왜군을 맞아 맹렬히 싸우다 장열히 승화한 곳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숭고한 의병장과 의병들을 생각하며 깊은 애도와 묵념을 올린다. 석주관 칠의사에 대해서는 뒷부분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화마가 할퀴고 지나 간 자리에 소나무가 새로 돋아 나고
소나무 숲 사이로 섬진강이 얼굴을 빼꼼이 내민다.
급경사 내림길이다.
어느 농장으로 급경사 내림길
꺽이고
또 꺽이고
굽이 돌아
다시 산자락 숲길로 접어든다.
길가에 예쁜게 핀 땅싸리비꽃이 앙증맞다.
꺽이고
편안한 소나무와 편백 숲길을 지나
울창하게 우거진 숲길도 지나고
둘레길 벅수를 지나서
꿀풀 꽃밭을 지나며 무상한 상념에 젖어든다.
쉼터정자 도착
휴 반갑네
잠시 쉬었다가 다시 걷는다.
싱그런 숲길
벅수가 반간다.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걷는 싱그런 숲길! 이 시기 이만한 즐거움이 어디 또 있을까? 최고다. 기분이
짱~
어느 농장을 지나
고사리 밭을 일구는 어는 농장
저멀리 구례들녁과 섬진강이 시야에 들어오고 하늘금엔 견두지맥이 유유히 흐른다.
섬진강 물빛은 이맘 때 가장 투명하고 아름답게 물든다.
토지면은 박경리 작가님의 장편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기도 한 곳이다. 우리나라가 일제를 거쳐 근대국가에서 현대 국가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왕권 계급사회에서 평등 민주사회로, 기존 기득권 세력과 새로운 신흥 기득권 세력 간의 이해 다툼 그리고 사회적 혼란과 가치관의 충돌 그 속에서 일어나는 토지의 소유권과 부의 새로운 가치 등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사회적 변화 소용돌이 속에서 그래도 끗끗하게 인간의 가치를 지키고 인간다운 삶을 추구해 보려는 한 집안의 흥망성쇄에 대한 이야기가 이곳 구례 토지면과 하동 악약면 일대를 중심으로 흥미진지하게 펼쳐지는 곳이다.
갈퀴덩굴 꽃잎을 자세히 보라. 사물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예쁘다. 예쁘게 보면 예쁘고 하찮게 보면 하찮다.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생각하자. 사물의 본질은 다 그 나름의 가치가 있고 모두가 다 예쁜 가치로 존재한다. 어떤 사물을 기준으로 예쁘다 안 예쁘다 하는 것은 지극히 사람들의 편협한 시각이고 대자연의 우주 질서 앞에서는 모든 것은 다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다 똑같은 가치로 보려하는 안목을 기르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갈퀴덩굴이 지천에 아름답게 피었다.
둘레길은 아스팔트 길에서 숲길로 접어 들고
원송계곡 물소리가 철철 들린다.
원송계곡 쉼터에 남도 이순신조선수군 재건로 안내판
어느 감나무 농장을 지난다. 부부가 열심히 감나무 손질에 여념이 없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길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다. 어디 농작물 뿐이겠는가? 사람이 그렇고 자연이 그렇고 행복이 그렇고 역사도 그렇다. 모든 것은 정성스런 마음에 달렸고 간절함에 달렸다.
파도리 마을이 가까워 온다. 아스팔트 길이 벌써 더워진다.
갈퀴넝굴 꽃밭이 파란 하늘아래 유난히도 아름답게 물들고 있다.
파도리 마을 윗길
왕시루봉이 하늘아래 손짓하고 파도리 마을 위 묘지가 잘 가꾸어진 길을 걷는다.
토지면 앞 섬진강을 가로질러 건너편에 계족산과 오산 자락이 짙은 녹음으로 익어가고
양귀비
지난해 고사리 여운이 그대로인 고사리밭 뒤로 하늘은 청명하고 왕시루봉은 눈이 부시도록 시리다.
어느 예쁜 담장 밑에 패랭이 꽃이 화려하게 피고
이제 파도마을로 접어 든다. 파도마을 구례군노인전문요양원 앞 쉼터 정자
여기서 오전 트레킹을 마치고 점심을 하기 위해 버스로 오미마을 숲속으로 이동하여 맛있는 점심을 한다.
점심 후 오후 트레킹 준비하고
구례군노인전문요양원을 지나고
멀리 하늘 아래 왕시루봉이 아득하다. 왕시루봉은 토지면에 우뚝 솟은 영봉이고 한때 외국선교사들이 한국전쟁 후 전염병을 두려워 해 고산에 주거지를 만들고 자기들만 청정한 세상에서 지내고자 한 흔적이 지금도 있어 씁쓸한 기억이 있던 곳이다.
왕시루봉은 참으로 아름다운 고지이다. 왕시루봉에 서면 구례 들녁이 훤히 트이고 섬진강이 유유히 흐르는 풍광은 참으로 청정하고 수려한 풍광 중에 풍광이다. 혹여 여건이 하락한다면 왕시루봉에 올라 보길 강추한다.
구산리 마을 위를 걷다보면
밤나무 꽃도 피어나고
온갖 수풀은 제철을 맞아 생명 성장이 활발하다.
곧장 가면 안돼요. 왼쪽으로 접어들으세요
긴 오름 아스팔트길
쉼터
긴 아스팔트길을 또 지나
고사리 밭을 지나고
수로를 따라 소나무와 단풍나무로 잘 정비된 긴 아스팔트 둘레길을 걷는다.
단풍나무 꽃이 참으로 예쁘다.
오손 도손 지리산 둘레길
수로와 함께 단풍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진 편안한 둘레길
긴 아스팔트 둘레길을 걷다 보니 저곳에 문수저수지가 보인다.
오○리님과 동행한 둘레길은 나에게는 참 의미가 있다. 사실 오래전에 지리산 둘레길을 걷겠다고 다짐하고 남원 주천에서 지리산 둘레길 1코스를 시작할 때 주유천하님과 같이 출발했기 때문이다. 이제 둘레길을 완료하기 위해 2코스가 남았다. 앞으로도 함께 지리산 둘레길을 걸어 나머지 2코스를 마무리를 한다면 나에게는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일이 될 것 같다.
문수저수지
문수저수지를 보고 싶었다. 문수골 때문이다. 문수골에 얽힌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고 싶어서다.
문수저수지 옆을 돌아
가슴반달곰이 활동하고 있는 문수골에는 동학농민운동의 선봉장 전봉준이 일본의 개입으로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여 관군과 왜군에 의해 패배하여 그 후손들이 잡히면 죽음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소리없이 숨어들어 살았던 곳이 지리산 토지면 문수골이다.
이제 오미리로 향한다.
한국전쟁 전후 여순민중항쟁 당시(여순민중항쟁 : 여수 주둔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4ㆍ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을 집압하는 과정에서 무참히 여수를 불바다로 포격하는 바람에 여수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항쟁) 김지회, 홍순석 등의 부대가 여수 순천을 점령하고 순천 송치재를 넘어들때 국군에 의해 처참히 몰살 당하고 그 남은 잔병들이 구례 간전면을 지나 섬진강을 건너 지리산으로 숨어 들어 온 곳도 문수골이다.
문수저수지 표지석
문수골에 있던 옛 동학농민운동 후손들이 화전민으로 골짜기에 숨어 살다가 여순민중항쟁 잔병들을 숨겨주게 되고, 이들이 나중에 남한 이현상 빨치산들과 합세하여 지리산 빨치산 된다. 이 지리산 빨치산들은 남로당 계열로 한국전쟁이 북한이 승리하면 자기들의 해방 세상이 오리라는 확신을 갖고 그 겨울 살을 애는 추운 지리산 골짜에서 3년간이나 국군에 항거 하다가 이승만 정권의 공비소탕작전에 의해 완전히 몰살되었다.
내죽마을
미국과 북한은 휴전협정을 하면서 남한의 남로당 계열 지리산 빨치산들의 북송에 대해 한 자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점은 북한 김일성은 언젠가 민족의 이름으로 실날한 비판을 받아야 하고 역사적 책임을 저야한다. 만약 그 당시 북한 김일성이 남한의 남로당 계열 지리산 빨치산들의 북송을 허가하는 협약을 했다면 이들의 억울한 죽음은 많이 면했을 것이다. 아마 김일성이 전쟁 후 북한 내에서 정치적 세력화로 커질 수 있는 이현상 지리산 빨치산들에 대한 정적 제거 차원에서 아예 모른척 했을 가능성이 크다.
내죽마을
그로인하여 얼마나 많은 지리산 빨치산들이 얼추 3만명 이상 되는 지리산 빨치산들이 북으로도 버림 받고 남으로 소탕의 대상이 되어 무엇을 위해 전장을 헤맷는지도 모르고 억울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마을 안길에 금개국
남북의 이념 대립으로 생긴 민족 상잔의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이차대전 후 세력확대를 위한 신 냉전체제와 이승만과 김일성의 정치적 야욕에 의해 희생적으로 벌어진 참으로 일어나서는 안될 전쟁이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누가 가장 고통을 받는가? 이승만인가? 김일성인가? 미국인가? 소련인가? 아무도 아니다.
5월 계절의 여왕 붉은 장미
이 땅의 죄없는 백성들만 속절없이 피아가 원수가 되어 죽고 죽이는 악순환으로 피비리내가 진동하는 아비귀환을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언젠가 남북이 통일되고 한국전쟁 전후 피아를 막론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영령들에 대한 역사적 사실규명과 아울러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추모할 때가 오길 기원한다.
내죽교를 건너며 바라 본 토지천
내죽마을
약 500년 전인 1500년경 진주하씨(晋州河氏), 김해김씨 (金海金氏), 경주이씨(慶州李氏)에 의하여 마을이 형성 되었으며,
그 후 문화유씨(文化柳氏), 진주정씨(晋州鄭氏), 밀양손씨(密陽孫氏) 등이 입촌하면서 큰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의 중심에 당산나무를 보아도 마을의 형성 시기가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나무가 큰 마을에 울창하여 대를 상징한 대(竹)자와 문수천의 시냇물을 따서(내)인 '대내'라고 불렀다는 설과 안쪽에 있다하여 내죽(内竹)이라 불렀다 한다.
이제 하죽마을
문수리 입구 표지석
하죽마을 샘터
마삭줄
하죽마을 앞 수로/ 문수저수지 물이 깨끗하게 마을 앞을 철철 흐르니 마음 또한 싱그럽다.
금환락지 구례 토지면 들녁
하죽마을
하죽마을 버스정류장
하죽마을
선비정신이 살아 숨쉬는 하죽마을
조선 영조 중엽(1754년) 경주이씨 이기명이 길지를 찾아 조선 팔도를 헤매다 아들 삼형제를 거느리고 정착하였다. 그후 택리지의 가거지 6처 중 가장 살만한 곳으로 찾아 이곳으로 이주해와 촌락이 형성되었다. 대나무가 온 마을에 울창하여 '대내'라 하였고 하죽은 아랫마을, '아랫대내', '바깥대내' 로 오랫동안 불리워 왔다.
하죽마을 앞 수로
하죽마을 쉼터
오미리로 향하고
한옥마을
서어나무 보호수
보호수 안내
운조루 앞 인공 연못
운조루 앞 수로
운조루 고택 설명 자료
태인능해
토지면에는 부자들의 나눔을 실천하는 곳인 운조루가 있다. "타인능해" 라는 쌀독을 집앞에 내 놓고 언제든지 누구든지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와서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했던 운조루 주인장의 깊은 배려심은 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 없는 노블리스 오블리주 표본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정신을 본 받아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배풀고 도와야 한다.
운조루 표지석
부자들은 알아야 한다.
만약 이 세상에 부자 혼자만 있다면 진정 부자가 될 수 있겠는가? 절대 불가능하다. 부자가 되는 것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의 그 무엇인가가 연결되어 그 속에서 자기가 조금 많이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자가 가지고 있는 부는 절대적으로 자기만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사회적, 명예적 부담을 의무적으로 해야한다는 것이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이다.
운조루
오미리 마을 앞을 지나
오미마을 버스 정류장
오미마을
영조 52년(1776년)에 문화류씨 유이주(柳爾胄)가 풍수지리 설에 의한 금환환락지(金環落地)에 운조루(雲鳥樓)를 지으면서 마을이 형성 되었으며, 그 전에는 오동이라 불렸다.
오동은 내죽, 하죽, 백동, 추동, 환동을 말한다.
마을의 안산이 되는 오봉산이 기묘하고, 사방으로 둘러싼 산들이 길하며, 물과 샘이 족하고, 풍토가 모두 질박하며, 터와 집들이 살아가기에 좋다 하여 오미리(五美里)라 불리고 있다.
마지막 벅수
오미정을 지나
지리산 둘레길 18코스 종점 벅수
시종점 기념 한장
지리산 둘레길 18코스(송정~오미) 구간은 많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둘레길이면서 또한 지리산의 싱그런 숲길을 걸으며 가슴이 열리고 시원한 바람결에 쉼과 휴식을 만끽하는 힐링 둘레길이였다.
◎ 석주관 칠의사 사당
석주관 칠의사 전적지
석주관 칠의사 묘 표지석
구례 석주관성
사적 제 385호
석주관성으 왜구가 섬진강을 통해 전라도 내륙으로 침범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고려 말에 만든 관문성이다. 이 성은 전라남도와 경상남도를 연결하는 지리산의요새이다. 곧 진주에서 남원으로 향하는 적을 막을 수 있는 목구멍과 같은 호남의 전략 요충지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 구레 의병들이 왜적의 전라도 침입을 막기 위해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한다.
석주관성은 지리산 노고단에서 왕시루봉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산맥에 위차한 칠봉산 남쪽 봉우리에서 칠의사 아래 주차장 후면까지 이어져 있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약 750m 이며, 성축은 흙과 돌을 섞어 쌓은 부분과 돌로 쌓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례 석주관 칠의사묘
석주관 칠의사 묘는 조선 선조 30년(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에 석주관에서 싸우다 순절한 의병 일곱 분과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당시 구례 현감을 모신 무덤이다. 왼쪽부터 현감 이원춘과 칠의사 왕득인,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 왕의성을 모신 묘이다.
선비 왕득인은 구례와 남원성이 왜적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모집하여 석주관성으로 가서 진주, 하동 방면에서 몰려오는 왜적과 맞서 싸웠다. 구례의 젊은 선비 이정익, 한호성, 양응력, 고정철, 오종, 왕의성 등은 구례로 들어와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는 왜적들에 맞서서 각각 의병을 수백 명씩 모집하고 화엄사에서 승병 153명과 군량미 103석을 지원 받아 왜적과 혈전을 벌였으나 석주관에서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전란 후에 칠의사 후손들은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여 혼을 불러 묘를 조성하였고, 순조 4년(1804)에 나라에서 왕득인을 포함한 칠의사의 충절을 기려 관직을 내렸다.
구례 석주관성 및 석주관 칠의사묘. 단 안내도
장사문
숙담문
제명각
칠의각
숭의각
숙담문
칠의사
칠의사
석주관 칠의사 사당 전경
칠의사 묘
석주관 칠의사 사당 전경
칠의사 묘 입구
칠의사 순절사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