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 이야기

2025.04.13. 고성 운흥사 - 통일신라시대 창건 천년고찰, 임진왜란 승병의 지휘소 및 조선수군의 전적지

하여간하여간 2025. 4. 14. 19:22

 

◎ 고성 운흥사

운흥사는 통일신라 676년에 의상대사(625~702)가 창건했다.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와룡산 향로봉 서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 활동의 근거지로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승병을 지휘하였으며 조선 수군의 주요 전적지였다. 임진왜란 중에 사찰 전체가 소실되었다가, 1651년에 다시 세웠다.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한 그밖에 범종루, 산신각, 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다.

 

운흥사 소재 문화재 중 괘불탱 및 궤는 보물 제1317호, 관음보살도는 보물 제1694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그밖에 1690년에 만든 운흥사 범종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

 

◎ 일주문

 

일주문이라는 말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사주(四柱)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가옥형태와는 달리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절에 들어서는 산문(山門) 중 첫번째의 문이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즉,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 불이문

 

‘불이’는 진리 그 자체를 달리 표현한 말로, 본래 진리는 둘이 아님을 뜻한다. 유마거사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이 유명하다. 

일체에 두루 평등한 불교의 진리가 이 불이문을 통하여 재조명되며, 이 문을 통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佛國土)가 전개됨을 의미한다.

 

 

◎ 운흥사 보제루

 

절에 따라 만세루(萬歲樓) · 구광루(九光樓)라고도 하나, 두루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에서 보제루라는 명칭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사찰 중심 불전의 정면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대체로 모든 법요식(法要式)은 이곳에서 행하고 있다.

 

그것은 사찰의 중심 불전인 대웅전 등이 대중을 모두 수용할 정도로 넓지 못하다는 데도 원인이 있지만, 중심 불전을 마주 올려다볼 수 있는 누각에서 법요를 베푸는 옛 방식의 하나로서, 근세에 이르기까지는 이 누각에서 예불하고 설법회를 개최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즉, 초기 가람 형태에서 금당(金堂)의 뒤편에 배치되었던 강당(講堂)의 기능을 이 누각이 금당의 앞쪽에서 대신하게 된 것이다.

◎ 대웅전 앞 3층 석탑

 

 

 

◎ 운흥사 범종루

 

2층의 누각(樓閣)으로 되어 있을 때는 범종루라 하고, 불전사물 가운데 범종만을 봉안하는 경우에는 범종각이라고 한다. 

 

이곳에 비치되는 사물은 모두 부처님에게 예배드릴 때 사용되는 불구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새벽예불과 사시공양(巳時供養), 저녁예불 때에 사용된다.

 

이들은 소리로써 불음(佛音)을 전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범종은 청정한 불사(佛寺)에서 쓰이는 맑은 소리의 종이라는 뜻이지만 지옥의 중생을 향하여 불음을 전파한다.

 

홍고는 북으로 축생의 무리를 향하여 

 

구름 모양의 운판은 허공을 나는 생명을 향하여 

 

나무로 만든 물고기 형상의 목어는 수중의 어류를 향하여 소리를 내보낸다는 상징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 고성 운흥사 대웅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된 대웅전 건물은 1731년(영조 7)에 재건한 것으로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법당으로, 운흥사의 중심건물이다. 

 

이 건물은 지붕을 받치는 공포가 매우 복잡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공포는 기둥 꼭대기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등 사이에도 설치되어 있다. 내부의 천장은 중앙으로 갈수록 높아지도록 층을 두어서 내부 공간이 넓게 느껴지도록 했다. 

 

전각 중앙에는 화려하고 섬세하게 조각된 불단이 있다. 불단 위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38호로 지정된 목조산세불 좌상이 모셔져 있다. 삼존불 뒷면의 벽 뒤에는 보물 제1317호로 지정된 괘불탱과 궤가 보관되어 있다.

 

 

◎ 운흥사 괘불탱 및 궤(보물 제1317호)

 

괘불탱은 사찰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할 때 앞뜰에 걸오 놓고 예배를 드리는 큰 불교 그림을 말한다. 가로 768cm, 세로 1,136cm 크기의 운흥사 괘불탱은 정면을 향해 서 있는 석가모니불이 화면 중앙에 있고 그 주위에 여러 불상이 배치되어 있다. 석가모니불의 좌우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서 있고 위에는 합장을 한 타방불과 관음보살, 세지보살이 아래의 불상보다 작게 배치되어 있다. 타방불은 석가모니불과 가까운 안쪽에,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은 바깥쪽에 배치되어 있다.

화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크게 그려진 석자모니불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두터운 법의를 걸치고 있으며, 오른손은 아래로 내렸고, 왼손은 엄지, 중지, 약지를 살짝 구부려 가슴 부근으로 들어올렸다.

장대한 신체와 넓은 어깨, 두터운 법의는 석가모니불의 무게를 더하고, 어깨에 닿을 정도로 처진 귀는 부처의 자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궤는 불화를 보관하는 상자를 말한다. 운흥사 궤는 당시의 금속공예를 연구하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길이 806.9cm, 너비 35.3cm, 높이 30.7cm의 궤에는 만, 왕, 십, 범자 모양의 정교한 금속 장식이 붙어 있다. 뚜껑 안쪽에는 궤의 조성 내용이 먹으로 쓰여 있는데, 괘불탱이 만들어진 1년 뒤인 1731년 3월부터 7월까지 여러 공인들이 함께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괘불탱 아래의  좌우에는 제작 경위가 적힌 화기가 있다. 화기에는 영조 6년(1730)에 금어*인 의겸 스님을 비롯하여 20여 명의 화승들이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금어 : 불화나 불상을 그리는 무리들의 우두머리를 일컫는다.

 

관음보살도(보물 제1694호)

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240㎝, 가로 172㎝. 화기에 의해 1730년(영조 6)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관음경』에 의하면, 관음보살은 남인도의 바닷가에 면한 보타락산(補陀落山)에 거주한다. 여기에 많은 성현이 살고 광명이 넘치며 나무에 꽃이 끊임없이 피어 늘 향기가 난다고 한다. 이곳의 맑고 깨끗한 연못가 금강보석(金剛寶石) 위에 관음이 결가부좌하고 있다. 관음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지시에 의하여 구도의 여행을 계속하는 선재동자(善財童子 : 구도(求道)의 보살 이름)의 방문을 받는다고 한다. 이 내용은 특히 고려시대에 많이 제작된 수월관음도 도상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운흥사 관음보살도는 이러한 수월관음도의 도상을 충실히 갖추고 있는 작품이다. 즉 화면 중앙에는 정면관(正面觀 : 앞에서 바라본 모습)을 취한 관음보살이 큰 원형 광배에 싸여 암벽 위에 반가좌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수월관음도에서 관음은 흔히 측면관(側面觀 : 옆에서 바라본 모습)을 취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에 반해 조선시대의 수월관음도는 거의가 정면관의 모습을 보인다.

관음보살은 화불(化佛)이 새겨지고 수많은 구슬로 장식된 매우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장식이 어깨까지 내려오고, 여기서부터 또 천의(天衣)를 따라 발아래까지 영락(瓔珞 : 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 장식이 길게 늘어져 있어 장식적인 의도가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가슴에서부터 대좌까지 구불거리며 내려오는 천의의 복잡한 흐름에서도 드러난다. 천의 표현에서는 도식적인 기법이 드러나 있다.

관음보살 아래에는 청문(聽聞)하는 선재동자와 여의주를 받쳐 든 남녀 인물상[용왕]이 배치되었다. 화면의 왼쪽 암벽 끝에 버들개지를 꽂은 정병(淨甁)과 파랑새[청조(靑鳥)]가 나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대나무 숲이 그려져 있어 관음의 자세만 다를 뿐 정통적인 수월관음도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고성 운흥사 영산전(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47호)

 

영산전(靈山殿)은 1731년에 중건된 건물이다. 정면 3칸, 옆면 2칸 크기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산화한 승병과 의병의 명복을 비는 영산제를 매년 이곳에서 거행한다.

 

영산전은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를 모시는 전각이다. '영산' 은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했던 '영축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영산전에 참배하는 것은 영산회상에 참석하는 것과 같다고 여겨진다. 영산전에 있던 팔상도는 8폭 중 7폭이 분실되어 현재는 한 폭만 남아 있다.

 

영산전에서는 임진왜란 때 목숨을 바친 승병과 의병의 명복을 빌고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연산재를 매년 음력 3월 3일에 봉행하고 있다. 이 영산재 때에는 보물 제1317호로 지정된 괘불탱이 걸리는데, 1년에 단 한 차례 일반에 공개되는 날이다. 

 

◎ 운흥사 명부전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주불(主佛)로 봉안하고 있으므로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한다.

 

법당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협시(脇侍)로 봉안하고 있다.

 

그리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안치하며, 시왕상 앞에는 시봉을 드는 동자상 10구를 안치한다. 

 

이 밖에도 판관(判官) 2구, 녹사(錄事) 2구, 문 입구에 장군(將軍) 2구 등 모두 29개의 존상(尊像)을 갖추게 된다.

 

 운흥사 산신각

 

산신각은 산악숭배나 마을신앙과 관련되어 있다. 대체로 1평 정도의 집에 산신당이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산신각이라는 명칭 외에 산신당·산명당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도 한다. 산신은 보통 지역수호신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으며, 산뿐만 아니라 산 주변의 지역을 관장하는 신으로 여겨졌다.

한국의 불교사찰에 있는 산신각은 고유 신앙의 수용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민간의 신앙이 두터운 칠성도 같이 모셔졌다. 명칭은 산신각·칠성각·삼성각 등으로 불린다. 현재 불교에서는 산신을 가람수호신과 산 속 생활의 평온을 지켜주는 외호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산신각은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을 모시는 건물이기 때문에 ‘전’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각’이라 하며, 이는 한국 불교 특유의 전각 가운데 하나이다.

 

◎ 운흥사 신행제

 

 

◎ 운흥사 선화당

 

 

 

◎ 운흥사 의병 활동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 6,000여 명을 이끌고 운흥사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승병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격렬한 전투가 승병의 근거지인 이곳에서 전개된 것이다.

이곳은 일본군 입장에서 볼 때는 군량미 조달을 위해 꼭 점령해야 하는 곡창지대인 삼남(三南)으로 가는 길목이었고, 조선군 · 승병 · 의병 입장에서 보면 이 길을 막아야 일본군의 보급로를 봉쇄하여 그들의 군사력을 최대한 약화시킬 수 있는 곳이다. 


이 때문에 이순신 장군도 작전회의를 위해 운흥사에 세 번이나 올라왔다고 한다.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대규모의 승군이 집결한 것이고, 일본군도 이곳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화력을 집중해 공격했다.

 

나중에 이곳을 점령한 일본군이 사찰에 불을 질러 대웅전 등 건물을 모두 불태웠다. 폐허가 된 운흥사는 방치되다가 1651년에 법성 스님이 중창했다.


◎ 운흥사 장독대

 

 

◎ 운흥사 전경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