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명산

2020.05.03. 전북 남원 수정봉(804.7m)과 구룡계곡

하여간하여간 2020. 8. 20. 11:20

1. 산행일자 : 2020.05.03 (일) 

2. 누구랑 : 원산우회

3. 산행구간 : 노치마을-덕운봉-수정봉-덕운봉-노치마을-구룡폭포-구룡계곡-탐방센터-육모정 

4. 산행개념도

 

5. 산행소감

우중 백두대간 길은 역시 싱그러움 그 자체다.
싱그러움을 말할려거든 우중 수정봉을 올라보거라
솔향 가득 소나무 숲 비단길을 걷고 싶거든 우중 남원 수정봉을 걸어보거라
산철쭉 백옥 청량함을 느껴보고 싶거든 우중 수정봉 산철쭉을 안아보거라
안무에 쌓인 신비스런 느낌일랑 우중 수정봉 백두대간 길에 서있어 보거라
우중 산행 평화로움은 운봉 농부 모내기 논길 손질에서 우러나오고
구룡폭포 흰 물보라 보는이로 하여금 경이로움에 빨려든다

 

6. 수정봉 소개

수정봉(804.7m)은 운봉읍 행정리와 이백면 양가리 경계에 있는 수려한 산으로 산 중턱에 수정이 생산되던 암벽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루고 섬진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의 분수계가 되며 이백에서는 650m의 높은산이 운봉읍 주촌리에서는 250m의 낮은 산이 된다. 입망치를 사이로 양지산성 남쪽에 위치한 수정봉은 운봉읍 주촌리와 이백면 과립리를 경계로 두개의 산봉우리를 포함하여 성의 평면 현태는 표주박 형태를 이룬다. 확인된 성의 길이는 150m 정도 된다. 성의 부대시설은 망대와 우물로 추정되는 웅덩이가 있었으며 망대는 성의 중앙부와 서쪽에 원형의 석축형태로 남았고 동쪽 산봉우리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 우물지는 원형이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석재를 이용하여 우물 시설을 마련한 것으로 추정된다.

 

7. 구룡계곡 소개

 

구룡폭포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 구룡계곡에 있는 폭포이다.

길이 약 30m이다. 원천천() 상류 구간인 구룡계곡의 가장 위쪽에 있는 폭포로,

원천폭포라고도 부른다.

구룡계곡의 아홉 절경을 구룡구곡()이라 하는데

구룡폭포는 그중 제9곡으로 구룡구곡의 백미로 꼽힌다.
가파른 절벽에서 급하게 낙하하는 폭포가 아니라

비교적 완만한 경사의 바위를 타고 미끄러지듯 떨어지는 두 갈래의 폭포이다.

폭포 아래쪽에 형성된 작은 소()에서 올려다보면

마치 용 두 마리가 하늘로 승천하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교룡담이라고도 한다.
구룡계곡은 지리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 구룡분소가 있는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에서부터 구룡폭포가 있는 덕치리까지 펼쳐지는

협곡으로, 곳곳에 기암절벽과 반석 그리고 소()가 있어 경관이 뛰어나다.

 

구룡계곡

용호계곡 또는 구룡폭포라고도 하며 음력 4월 초파일이면 아홉마리의 용이 내려와 아홉 개의 폭포에서 한마리씩 노닐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4km구간에 9곡이 펼쳐진다.

 

제1곡 : 주천쪽 지리산 국립공원 매표소에 조금 못미치고 있는 송력동 폭포(흔히 약수터라 함)

제2곡 : 매표소 상부 5m의 암벽에 명필 이삼만의 용호석문이란 글씨가 있는 절벽 아래 흰 바위로 둘러싸인 못(불명추라함)

제3곡 : 육모정에서 300m지점 황학산 북쪽 암벽 서편 조대암 아래 조그마한 소에서 학들이 물고기를 잡아 먹었다는 학서암

제4곡 : 학서암에서 300m쯤 오르면 물살에 닳아 하얗게 반들거리는 구시 모양의 바위와 물 가운데 우둑 솟은 큰 바위가 있고, 스님이 꿇어 앉아 독경하는 모양의 작은 바위를 서암(또는 구시암)이라 부른다

제5곡 : 구시소에서 1km 지점에 45도 방향 급경사를 이룬 암반을 미끄러지듯 흘러 내린 곳에 있는 유선대를 말한다. 이 가운데 바위에는 금이 많이 그어져 있는데 신선들이 병풍을 치고 몰래 바둑을 두었다 하여 은선병이라 한다.

제6곡 : 유선대로 부터 500~600m쯤 거리에 구룡산을 비롯한 여러 산줄기에서 내려 온 계곡물이 모이고 둘레에 여러 봉우리가 있는데 제일 뽀족한 봉우리가 계곡물을 내지르는 듯하다 하여 지주대라고 부른다

제7곡 : 지주대로부터 왼쪽으로 꺽이면서 북쪽 1km지점에 직각의 암석층을 흘러 물이 벽을 타고 포말린다 하여 비폭동이라 한다.  

제8곡 : 비폭동에서 600m쯤 올라가면 거대한 암석층이 계곡을 가로질러 물 가운데 우뚝 서 있고 바위 가운데가 대문처럼 뚫려 물이 지난다고 하여 석문주 또는 경천벽이라 한다.

제9곡 : 멀리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두 갈래 폭포를 이루니 마치 두 마리 용이 어울리어 꿈틀거린다 하여 교룡담이라 한다.

 

백두대간 노치마을에서 산행 시작

 

백두대간 구간 중 마을을 지나는 곳은 이곳 노치 마을이 유일하다.
목돌(목 조임석) : 일제 강점기 일제는 1910년부터 백두대간은 물론 한반도 주요 길지 혈맥에 쇠 말뚝을 박거나 인위적으로 길을 내어 우리 민족정기의 기와 맥을 끊는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남원 문화원에 따르면 '이 목돌 역시 일제가 백두대간의 맥을 끊기 위해 노치마을 앞 뜰에 길이 100m 폭20m 깊이 40m의 방죽을 파 지맥을 끊었고 그안에 목돌 3기(6개) 설치했다' 고 한다. 노치 마을 앞 뜰은 덕우봉에서 고리봉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으로 사람의 신체에 비유하면 목에 해당하는 지점으로 이곳에 목돌을 설치 숨통을 조이도록 했다.

민족정기 끊으려던 일제 '목돌' 발굴(2013.08.07)

 

일제강점기 때 우리 민족정신을 끊고자 백두대간에 설치한 것으로 알려진 '목돌(일명 잠금석)'이 다시 세상에 나왔다.

남원문화원(원장 이병채)은 최근 남원시 관계자, 마을주민 등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운봉읍 주촌리의 한 가정집에 묻혀있던 목돌 5개를 집에서 1.5㎞ 가량 떨어진 노치마을로 옮겼다.

노치마을은 백두대간이 마을을 지나가는 유일한 지점이며, 덕음산에서 고리봉으로 연결되는 곳으로 사람의 신체로 비유하면 목에 해당된다.

남원문화원은 일제가 목을 조여 숨을 못쉬도록 하기 위한 수단으로 노치마을 일대에 길이 100m, 폭 20m, 깊이 4m의 방죽을 만들어 지맥을 끊고 그 안에 목돌을 설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잠금석을 설치해 민족정기를 단절하려는 일제의 악행이라는 시각이다.

이병채 원장은 "지금도 마을사람들은 당시 만들어진 방죽을 '울대'로 기억하고 있고, 이 잠금석을 설치하고 난 뒤 지리산에 3일간 천둥번개가 치고 하늘이 울었다고 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노치마을에 있던 목돌이 어떻게 1.5㎞ 이상 떨어진 개인 집에 묻혀 있었을까?

남원문화원은 "15년 전 경지정리작업 중에 발견된 목돌이 개인 집으로 옮겨져 그동안 정원석으로 사용됐고, 제68주년 8·15 광복절을 앞두고 여러 차례 목돌 소유주를 설득해 백두대간 길목인 노치마을로 옮기게 됐다"며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한 일제의 악행을 알려 역사적 교훈으로 삼고자, 노치마을 백두대간 표시판 앞에 이 목돌을 전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치마을로 옮겨진 목돌은 너트형으로 된 5개의 석물이다. 하나의 크기는 가로 120㎝, 세로 95㎝, 두께 40㎝로 두 개를 하나로 연결할 경우 가로 120㎝, 세로 190㎝ 정도로 구멍의 직경은 100㎝에 이른다

노치샘 이야기 : 현재 노치샘은 원래 고려시대 절터로 고승이 도술로 판 샘이라고 한다. 바위에서 나오는 생수는 물맛이 뛰어나 염병(장티푸스) 같은 돌림병이 심하게 돌던 때도 이 물을 마신 사람은 신기하게 병에 걸리지 않고 병을 이겨냈다고 전해오고 있다. 혹시 물은 쓰다 부족할 때는 우물속의 달팽이 모양에서 물을 떠야하는데 반드시 마을 처녀가 물을 퍼올려야 할만큼 정하게 여겼다. 주신제 때는 정원 초하룻날 우물을 품고 새끼줄로 금줄을 쳐서 아무도 들어갈수 없게 해놓고 당산제 당일 이른 새벽 제사에 올릴 정안수를 뜨러 가면 산신인 호랑이가 샘 주위를 돌며 지키다가 제사가 시작되고 첫물을 올리는 것을 확인하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셨다는 어르신들도 많다. 이렇듯 마을 사람들이 신성시 하는 식수로, 또 병을 이기게 해주는 약수로, 신비로운 전설의 성수로 오늘도 백두대간을 찾는 탐방객이 한모금 목을 축이며 쉬어가고 있다.

 

우중 백두대간을 혼자 호젓이 걷는다. 대지는 생명의 희망이 꿈뜰거리고 짙은 운무속에 살뿐이 불어오는 실바람에 대간길은 서늘하면서도 솔향 가득 가희 천상의 길을 걷는 기분이다. 이런 저런 잡생각을 떨쳐버리고 아무생각 없이 걷노라면 언제 왔나 모르고 덕운봉에 다다른다

 

언제 보아도 반가운 산철쭉! 그 깨끗함에 보고 또 보고 순백한 매력에 푹 빠져든다
오늘 산행은 무리하지 않으려고 여원재에서 출발한 A조와 동행하지 않고 혼자 노치에서 수정봉까지 왔다가 다시 수정봉에서 다시 노치마을로 회귀하고 구룡계곡으로 코스를 잡는다. A코스 대원들을 만나 한 컷

 

룡폭포로 가는 갈림길에 어느 수행자의 쉼터가 있다. 거주 흔적은 있지만 거주자는 없다. 언젠가 또 다른 수행자가 이곳을 지키려나 보다.
대부분 산꾼들은 여기서 구룡폭포 가는 방향을 잡고 구룡산으로 해서 구룡폭포 코스를 잡는다. 우리 일행은 노치마을 코스를 따라 진행한다.
노치마을 보호수 4구루이다.

 

노치마을 당산제전

노치마을 당산제

 

[정의]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 노치마을에서 7월 백중에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올리는 제사.

[연원 및 변천]

옛날 노치마을에는 오래 전부터 민씨들이 들어와 살았는데 그들 중에 짚신을 만들어 팔았던 가난한 거지가 있었다. 추운 겨울에 거지가 죽자, 동네 사람들이 그를 묻어 주려고 하였으나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묻을 만한 곳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관이 하나 들어갈 정도로 눈이 녹아 있는 땅을 발견하고 그곳에 묻어 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이 황룡무주(黃龍無主)의 명당이었다. 그 후로 마을 사람들이 산에 보답하기 위해서 음력 1월 1일 밤 12시에 주산제(主山祭), 곧 당산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노치마을 당산제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월 1일에 지냈는데, 몇 년 전 자손이 없던 마을 노인 두 분이 세상을 떠나면서 전답을 동네 당산답으로 기증을 하여, 마을 주민들이 두 노인을 위해 해마다 7월 15일에 제사를 지내다가, 3년 전부터 당산제를 7월 백중으로 옮겨서 지내게 되었다.

[신당과 신체]

마을 뒷산에 있는 할아버지 당산은 소나무와 토석단이 결합된 형태이고, 할머니 당산은 큰 바위이다.

 

[절차]당산제를 지내기 한 달 전에 제주로 축관, 헌관, 밑주비(음식 장만하는 집)를 선정한다. 이들은 먼저 동네 우물물을 퍼낸 후 대나무와 금줄을 둘러서 마을 사람들과 외부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음력 정월 초하룻날 당산제를 지낼 때는 오전에 금줄을 쳐놓은 우물물로 음식을 마련하여, 당일 밤 12시에 뒷당산(할아버지 당산)에서 먼저 제를 지내고, 바로 내려와서 우물에 친 금줄을 걷어다가 마을의 조산에 쳤다.

당산제를 지내는 날은 모든 사람이 문밖출입을 삼가고, 비린 것을 먹으면 안 된다. 또 상주집을 제외한 모든 집 대문에 금줄을 치며, 특히 제주들의 집에는 마당에서 부엌까지 황토를 깔아 놓는다. 옛날에는 정성이 부족하면 호랑이가 동네 개를 물어갔다고 한다. 당산제를 지낼 때 불을 켜놓으면 정월 대보름날까지 그대로 놓되, 한밤중에라도 꺼지면 즉시 다시 켜놓았다고 한다.

[축문]

維歲次 某年 某干支 朔某日 干支 敢昭告于 幼學 姓名000 天作高山 遠自崑崙 近祖八公 龍來千里 崔嵬磅礡 峻極至此 德陰一峰 爲邦主鎭 其下住民 實蒙靈驗 自成部落 設壇奉享 降福于世 數姓團合 略設酒脯 以繼舊例 神其欽享 保佑無量 敬神奠獻 尙 饗

(이 해의 차례는 00년 모 간지 초하루 모일에 유학 000는 감히 고하나이다. 하늘이 높은 산을 만들고 멀리 곤륜으로부터 가까이는 팔공을 비롯하여 용이 천리에 내하고 산이 아주 높고 험한 것이 혼합하여 하나가 되고, 이곳에 이르러서 아주 높게 되었나이다. 덕음 일봉이 주 진산이 되고 그 아래 백성들이 거주하게 되고 실로 영험을 입어 스스로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제단을 설하여 봉향하나니 세상에 복을 내림에 많은 성(姓)씨들이 단합하여 간략하게 술과 포를 진설하고, 옛날의 예로써 계승하여 신(神)께 공경히 제향하나니 끝없이 보살펴 주시옵소서. 신께 경건히 드리옵나니 흠향하소서.)

 

노치마을 앞 뜰 저 쪽 마을길이 백두대간 길로 섬진강물과 낙동강물을 가르는 분수령이 된다
구룡폭포 가는 길목에 활짝 핀 철쭉 군락지! 비온 뒤 울을 머금은 철쭉 꽃잎이 싱그럽고 참 예쁘다

 

구룡폭포

구룡폭포

[정의]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덕치리 사이에 있는 원천천 구룡계곡의 9곡 중 제9곡.

[개설]

구룡폭포는 교룡담과 함께 용호9곡 중 최상류로 만복대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구룡계곡에서 누워 있는 형태의 폭포를 만들었다. 일명 원천폭포라고도 한다.

[명칭유래]

음력 4월 초파일이면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홉 군데 폭포에서 한 마리씩 자리를 잡아 노닐다가 다시 승천하였다는 데서 구룡계곡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 구룡계곡에는 실제 12곡이나 있으나 수를 나타내는 숫자 가운데 9를 제일 큰 수로 치기 때문에 9곡이 되었다.

[자연환경]

만복대에서 발원하여 주천면 고기리까지 급경사를 이루던 계곡은 주천면 고기리덕치리에서 운봉분지의 한 부분을 이루며 완만하게 흐른다. 고기리덕치리를 완만하게 흐르던 원천천(元川川)구룡폭포에서 경사가 급변하게 된다.

경사가 큰 운봉분지 외벽 하천들은 하방침식이 왕성하여 두부침식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운봉분지의 람천은 하방침식이 약한데 반하여 두부침식이 왕성한 원천천람천으로 흐르던 상류의 하천 유로를 원천천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과정을 하천쟁탈이라고 한다.

원천천의 두부침식에 해당하는 부분이 구룡폭포이며 천이점(遷移點: 하천의 중간에서 강바닥의 기울기가 갑자기 변화하는 지점, knick point)이 된다. 구룡폭포에는 화강암의 기반암이 드러난 채 구혈(甌穴: 하상 암반의 깨진 곳에 생긴 원통형의 깊은 구멍, pot hole)과 폭포가 발달하였으며 이 구혈이 교룡담이다.

[현황]

구룡폭포의 높이는 10m이며 경사를 따라 흘러내리는 폭포의 길이는 30m 정도이다. 남원팔경 중에서도 제1경으로 꼽히는 절경으로서 높은 곳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용돌이친 다음 미끄러져 내린다.

우렁찬 소리와 함께 굽이쳐 흘러내리는 폭포수를 보고 있으면 무섭기까지 한데, 물거품을 날리며 떨어지는 폭포 주위에 햇빛이 비치면 오색의 무지개가 아롱거리는 장관도 볼 수 있다.

지리산 관광도로가 개설되어 구룡계곡의 경치를 보다 편리하게 감상할 수 있다. 교통편은 남원시에서 육모정행 시내버스를 타면 된다. 하루 16회 운행되며 남원시에서 구룡폭포까지는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용이 승천하는 구룡폭포에서 만 백성을 굽어 살피소서 염원하는 마음 담아 한 컷
구룡계곡에서 조망이 제일 좋은 곳이다. 망중한으로 오늘 산행을 만긱하고 있는데 산우님께서 뒷모습 짤깍
비폭동
육모정에서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한다.

육모정

[정의]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 지리산 입구에 있는 원동계(源洞契) 관련 유적.

[개설]

원동계는 1572년 지역 선비들이 용호상(지금의 구룡계곡의 구곡과 구곡 사이의 경치 좋은 곳으로 구룡계곡이라고도 함)에 모여 서로 존중하며 의리와 신의·성실로 두터운 친분을 새기며 고금을 논하고 도의지심과 상부상조를 더욱 돈독히 하고자 만든 조직이다.

선비들은 성리학의 대가인 주자(朱子)와 그의 선배인 여남전(呂藍田) 선생의 가르침을 잇고자 원동계의 목적을 예의, 의리, 도덕에 두고 수십 가지의 규약을 정하여 지역 주민들을 선도하였다.

1638년 이 지역의 정훈(鄭勳), 조경남(趙慶男), 정사진, 유기명, 박유 등 많은 인사들은 원동계를 수정하여 중국에서 주자의 초상화를 들여와 원천동 사당에 봉안하고 주자의 가르침을 기리며 후학을 양성하고 춘추로 제사를 올려 계원 상호 간의 우의를 다져왔다.

그 후 남원부사도 적극 동참하여 계가 번창하였으며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여 많은 인재를 배출함에 따라 원동계는 남원 전역에 보급되어 권선징악과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왔다.

[건립경위]

원동계는 420년을 이어온 국내 전통 있는 향약으로 육성 계승되는 동안 계원들의 모임 장소와 후학 양성소로 육모정과 용호정을 건립하였다.

[변천]

육모정은 계곡 등 주변 경관이 뛰어나 남원 지역에서도 널리 알려진 곳이었으나 1961년 수재로 유실되었다. 이후 원동향약(源洞鄕約)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46호로 지정됨에 따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리산에 유서 깊은 육모정을 복원하자는 뜻이 모아져 1997년 남원시의 지원으로 현재의 위치에 복원되었다.

[현황]

육모정 한 동이 서 있으며 계곡을 가로지르는 철제 다리가 놓여 있다. 인근에는 춘향묘가 있으며 지리산 북부관리사무소 구룡분소가 있다.